'무조건', '자옥아'로 유명한 트로트 가수 박상철(51)의 충격적인 가정사가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2020년 8월 4일 디스패치는 박상철이 겪고 있는 '사랑과 전쟁'을 자세히 전했습니다. 박 씨는 '불륜-이혼-재혼-소송'을 모두 겪었다. 법정 다툼은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디스패치 보도에 따르면 박상철은 전처A씨와 결혼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B씨를 만나 불륜관계를 맺고 두 집 살림을 하다 B씨와의 사이에서 딸 C양을 낳고 이후에 첫 번째 부인과 이혼을 합니다.
B씨와 혼인신고를 하고 혼외자였던 C양을 호적에 올렸다고합니다.
이후에 아내 B씨와 박상철은 다섯번의 고소와 두번의 소송으로 법정 다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MBC ‘실화탐사대’에서는 가수 박상철씨의 부인이 10여년간 남편의 그림자처럼 살았다며 박상철의 두번째 부인 A씨는 "10여년간 폭언에 시달렸다"고 주장하며 한 남성의 목소리가 담긴 음성 파일을 건넸습니다.
녹취파일에는 대화 내내 고함을 지르고 욕설과 비난을 퍼붓는 한 남성이 있었고, 이 남성은 박상철 이었습니다.
녹취록에는 박상철로 추정되는 인물이 "XXX 왜 전화질이야. 교육을 너희 엄마가 잘못시켜서 너 같은 생각 너 같았으면 벌써 XX버렸어"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전 부인 A씨는 "집을 나올 때 폭언과 폭행으로 경찰까지 출동했다. 이웃들도 큰 소리를 들었고 얼굴에는 멍 자국이 자주 남아있었다. 딸 B양은 아빠가 찾아올까 두렵다"고 호소했습니다.
A씨는 "딸을 출산할 때 이름을 못 적게해 미혼모로 아이를 낳았다"고 덧붙였습니다.
10여년간 폭언에 시달려왔다고 주장하는 두번째 부인은 2019년 7월부터 딸과 집을 나와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집을 나왔을 당시에 폭행, 폭언으로 경찰까지 출동했다는 충격적일 말을 털어놓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멍자국도 남아있는데... 아내는 박상철이 딸과 지내는 곳으로 찾아올까봐 두렵다고 호소했습니다.
이에 박상철의 입장도 등장합니다.
박상철은 사생활 논란 보도가 나온 후, 사랑의 콜센타 녹화도 불참을 선언했으며, 트롯 전국체전도 출연을 안 하기로 하는 등 방송 활동도 잠정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실화탐사대'에서 최초로 박상철씨의 입장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박상철은 두번째 부인의 주장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만났을 때도 돈이 목적이었다며 팬을 가장해 접근을 했으며 이후에는 협박 문자들로 고통스러웠다고 심지어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었다고 호소합니다.
박상철은 “허언증 환자하고 싸우고 있다. 미저리고 꽃뱀”이라며 모녀가 꾸민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박상철은 “공식적 허언증이다. 미저리고 꽃뱀이다. 확실한 꽃뱀이다”라며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근데 내가 참고 있는 거다.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하냐”며 억울해 했습니다.
박상철은 이어 “오히려 내가 맞았다”며 “내가 고막이 터지자 스스로 자기를 자해했다”고 했다. 박상철은 두 번째 부인이 ‘무조건’으로 인기몰이 중이던 당시 명품을 선물하며 계획적으로 접근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그 사람을 만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상철의 이같은 주장에 두 번째 부인은 “말도 안 된다. 전부 거짓말이다”라고 반박했다. 오히려 박상철이 팬카페에서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부인은 스물일곱 살이었던 자신에게 유부남이었던 박상철이 먼저 접근해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내연관계를 유지하며 혼외자까지 낳기를 원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2014년 첫 번째 부인과 파경을 맞은 박상철은 2년 뒤 두 번째 부인과 혼인신고를 하고 엄마 성을 따르던 딸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박상철이 전처와 두 집 살림하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됐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도 고소와 소송은 현재진행중이며두번째 부인B씨의 고소에 대해 박상철은 모두 무혐의 처리 되었으며 2019년 7월 폭행 혐의만 벌금 50만원의 약식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박상철이 2020년 2월 B씨를 협박 혐의로 고소한 것은 B씨에 대해 벌금 200만원 구약식 처분되었습니다.
서로 너무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가 없네요...
오랜 시간 내연 관계에 있다가 법적 부부가 되었는데, 두 사람의 갈등은 더 깊어만지고 있습니다.
이에 네티즌들은 "내가보기엔 솔직히 똑같네요ㅋ 바람펴서 동거까지한 박상철이나 유부남뺏은 두번째부인이나" ,"와 이러면서 놀면뭐하니 나와서는 세상 부끄럼 많은척 낯가리는척 연기 했던거야? 웬일이야 설사 여자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저런 욕설에 막말에 저것만봐도 박상철 쓰레기 인정이네" ," 물론 박상철씨도 나쁘지만 당신도 한 가정을 박살낸 불륜녀 입니다. 이 프로그램에 나올 사람은 당신이 아닌 전처분이고 피해자는 당신이 아닌 전처의 두아들과 당신의 10살 짜리 딸내미 입니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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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철은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고 트로트의 황태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런데 박상철이 가수로 큰 성공을 하고 돈과 인기를 얻고 나니 조강지처를 버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이혼 루머도 퍼지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박상철 이혼, 박상철 재혼 등의 루머는 전혀 사실이 아니지요.
박상철은 이런 루머를 극복하기 위해서 박상철 부인 김점숙과 함께 방송에 출연을 일부러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박상철이 지금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내가 있었기 때문인데 자신이 성공했다고 배신하는 인성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연예계에서도 성격 좋고, 열정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박데뷔 후 한번도 소속사를 옮기지 않은 의리파로 소문이 나 있는데, 박상철의 평소 행실과 그의 인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상철의 인성을 봤을 때 절대 아내를 배신할 인물은 아닌 것 같네요.
박상철은 엄청난 노력파입니다. 신인 때부터 전국을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자신을 홍보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지요.
행사 출연 기준 역시 개런티의 액수에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렇게 바닥에서 올라온 그이기에 누구보다 열심히하고 또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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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특전사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가수의 꿈을 가졌던 그는 서울로 이동하여 가수가 되기 위해 작곡가 사무실을 오가며 노래연습을 하고 음반을 만들기 위해 일용직 노숙자 생활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고교 졸업 직후 19살 어린 나이에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서울에 상경한 후 미장이 일과 공장일 등을 하며 돈을 모았는데, 충무로에서 만난 작곡가에게 천만원을 주면 정식 가수로 데뷔시켜 주겠다는 유혹으로 사기를 당하고, 거의 거지꼴이 돼서 충무로 지역 내의 경비가 허술했던 건물이나 서울역, 구로역 같은 지하철역들에서 노숙을 하며 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살다가, 우연히 만난 한 중년 노숙자의 말에 감화되어 다시 새롭게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향 삼척시로 돌아가 돈을 벌어 가수의 꿈에 재도전하겠다는 목적으로, 1993년 강원도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에 도전하여 가수 유열의 '화려한 날은 가고'라는 노래로 전체 1등인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다시 가수의 길로 들어설 동기를 얻기 시작했다.
1991년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삼척시내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미용실을 발견하고 헐값에 인수해 ‘박상철 헤어아트’ 간판을 내건 미용실을 개업했다. 두 사람은 당시 스물다섯, 스물 셋으로 다소 어린 나이였고 나이차는 2살로 아내가 연하다.
두 사람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차곡차곡 기반을 다져갔고 미용실은 개업하고 얼마 안돼 삼척 시내에서 ‘노래 불러주는 남자 미용사가 있는 미용실’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미 결혼하기 전 ‘가수가 되겠다는 남편의 꿈을 절대 막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써뒀다”며 웃었다.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박상철 헤어아트"를 개업하여 미용사로 잠깐 활동하였다. 당시 미용실까지 유명해지면서, 그때부터 '노래하는 미용사라는 기믹을 밀기 위해서 일부러 머리를 길게 길러 장발 스타일을 유지하기 시작하였고, 정식 음반으로 데뷔를 한 30대 중반까지 장발을 유지하였다.
강원도 삼척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노래실력이 뛰어나 동네 노래자랑을 비롯해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무작정 상경했으나 돈이 없었고 그는 돈만 있으면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날부터 인력시장을 전전했고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노숙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 배운일이 미용.
전국노래자랑에서 만난 인맥으로 기획사를 만나게 되어, 2000년 1집 부메랑으로 데뷔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사정은 안 좋아 금호동 옥탑방에 월세를 살며 재연배우나 리포터 일을 부업으로 병행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2001년에 발표한 '자옥아'가 2003년부터 히트를 치면서 먹고 살 만해지고, '무조건'의 대히트로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2005년 3집 <무조건>이 큰 히트를 치면서 10년 무명 생활을 청산했다.
박상철은 전국노래자랑 대회에서 1등을 기록했고, 이를 계기로 PD에게 가수를 시켜달라고 졸랐다고 합니다. 그 선생님이 작곡가 박현진을 소개시켜줬다고 하지요. 박현진 작곡가는 신토불이 작곡가인데 이를 계기로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로 올라가서 노래 수업을 받았고, 드디어 2000년 트로트 가수로 데뷔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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