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계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인으로는 오랫동안 앓아오던 질병 때문에 결국 별세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가지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최초의 TV탤런트 출신 영화배우로서 원래 탤런트로 데뷔를 했다가
영화 1958년작 어디로 갈까로 데뷔를 하며 다음 해 가는 봄 오는봄으로 메가히트를 하면서
인기를 얻으나 그 이후로는 뚜렷한 활약이 없습니다.
그러다 1968년에 미워도 다시한번이란 작품으로 주연급조연으로 좋은 활동을 합니다.
이 작품을 계기로 흥행배우에 속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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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현 여사는 암스트롱이 달에 발자국을 남길 때 TV중계해설자로 유명해지면서 ‘아폴로 박사’란 닉네임이 붙은 천문학자 조경철 박사와 결혼해 더욱 화제가 됐지만 부군은 2년 전 타계했다.
독신으로 살지만 누구보다 화려했던 여배우 시절의 눈부신 추억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해준 아폴로 박사와의 로맨스가 아직도 그의 가슴과 체온을 식지 않고 외롭지 않게 데워주고 있었다.
**왜 그렇게들 눈물을 짜냈다고 생각하세요?
남편에게 아이까지 둔 젊은 여자가 있다고 본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눈앞에 나타나면 그걸 그냥 머리끄댕이를 잡고 길바닥에 후련하게 내동댕이를 쳐야 분통이 풀리는 건데 그 영화는 본처가 분노를 억누르며 젊은 나이로 남의 첩이 되고 아이까지 낳은 입장을 가련하게 생각하는 데 있었던 것 같아요.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건데 복판에 낀 아역의 김정훈이 워낙 어른들을 애절하게 만들었어요.
**이어서 출연하신 다른 작품은?
역시 신영균 씨와 출연한 정소영 감독의 <잊혀진 여인>도 히트했는데 그것도 애정 멜로물이었어요.
풍기는 이미지 때문인지 많은 작품에서 아내의 속을 썩이는 바람둥이 남자의 정숙한 본처역을 하셨지요?
하하하. 그게 영화에서의 한동안 내 팔자였던가 봐요. 돌아가신 김기영 감독의 <화녀>에서도 그랬고 추적 당하는 빨치산 얘기를 다룬 김수용 감독의 <산불>에서도 비슷한 역을 맡았었지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화인 모임이나 종교단체 관련 행사에 참석할 때도 있고 마음이 편안한 친지를 만나면 세상 이야기, 사람 이야기 나누며 살아요.
**신심이 깊은 크리스찬이시지요?
학생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은 잊고 살다가 결혼 후 다시 교회를 찾았어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신도수가 10만명을 넘어서기까지 성장을 지켜보며 함께 했어요.
나중에 연예인 초교파 모임에 참여해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연예인 선교 10주년 기념행사로 뮤지컬 <건너가게 하소서>를 제작해 전국 순회공연을 했었지요.
**선교 뮤지컬이군요.
유대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자신은 건너가지 못하고 눈을 감은 모세의 생애를 담은 성극이죠.
1992년 호암아트홀, 국립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대구 진주 부산 지역을 돌며 대성황을 이루어 배우활동을 그만둔 후 내가 해낸 큰 사업이어서 지금도 의미 있게 생각해요.
**그 때 연예인으로 어떤 분들이 참여했어요?
지금은 목사로 계시는 임동진 씨가 모세역으로 출연했고 무대에 오른 출연진만 80명의 대작이었어요.
연예인 선교모임이 30여개쯤 될 때 우리 모임이 큰 모임 중의 하나였는데 가수 윤복희, 현미, 연기자로 한인수 씨 등 많았어요.
타계한 남정임 문오장 씨 등도 모두 헌신적으로 참여한 선교모임의 멤버들입니다.
지금도 가깝게 지내는 영화인은 어떤 분들입니까?
오래전 함께 활동하던 배우들이 하이얏트에서 모여 정기적으로 만나 친목을 나누자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최은희 태현실 이빈화 남정임 엄앵란 최지희 문희 고은아 씨 등 1960년대를 세상에서 제일 바쁘게 보낸 배우들인데 그중에 먼저 떠난 분도 생기고 하니까 만남이 뜸해졌지만 이런저런 모임에서 얼굴을 보며 옛날 얘기하며 지냅니다.
**공주사범학교를 다니셨는데 어떻게 배우가 되셨어요?
아버님이 공직에 계셨지만 선대부터 집안이 공주의 소문난 지주 가문으로 성장기는 평탄하고 엄격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토지개혁으로 재산이 줄고 가족도 서울로 이사와 나도 새로운 일자리를 필요로 했어요. 당시 교통부 산하의 기관에서 공무원으로 3년간 근무했었지요.
**영화보다 TV연기를 먼저 시작하셨군요. 최초의 탤런트라면 초기 TV방송의 비화도 많이 기억하고 계시겠군요.
프로듀서 1호로 꼽히는 최창봉 씨가 편성국장을 하셨고 영화감독이 된 장일호 감독도 동료 연기자였어요.
이순재 씨는 학생이었지요. TV가 귀해서 다방에 가야 볼 수 있어서 사람들이 커피보다 TV드라마를 보기 위해 다방에 몰려 있던 시절이지요.
**영화로 옮긴 계기는요?
1958년 중앙영화사의 오의겸 사장이 찾아와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니 믿어달라며 영화에 출연해 달라고 간청을 해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호감을 나누신 건가요?
그건 아니구요. 나중에 알고 보니 조 박사가 프로듀서에게 나를 초대 손님으로 출연시켜달라고 졸라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지요. 첫날은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고 싶다고 해서 별생각 없이 알려주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철야 촬영을 하고 내가 살던 서울의 최초 아파트인 세운상가 9층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조 박사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바로 밑에 와 있다며 잠깐 방문하면 안 되겠느냐고 해서 그럼 커피나 한 잔 하고 가시라고 했지요.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커피를 끓여 드렸을 때 마침 프림이 떨어져 맨 커피를 들고 가셨어요.
그후 그 때는 구하기 힘든 프림을 선물해 주시고 이어서 내가 출연한 영화 <잊혀진 여인>의 포스터를 보고 나의 출연 장면을 50호짜리 유화로 그려와 선물하셨지요.
**단계적으로 호감을 전달하셨군요.
그림을 받는 순간 감동을 느껴 안 만날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한 것이지요. 그 후 대만을 다녀올 때 김포공항까지 나와 꽃다발을 안겨주면서 적극적으로 다가왔고 이어서 아현동에 있는 미군부대 안의 클럽을 찾아 식사를 하며 데이트를 시작한 것이지요.
**떠나신 후 힘드셨지요?
내년 3월이 3주기인데 둘이 살다가 먼저 가셨으니 하루도 생각 안 나는 날이 없지요.
병상에 계실 때 그 양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의사의 지시로 드리지 못했을 때가 자꾸 떠올라 그게 가슴 아파요. 그렇게 가실 줄 알았다면 원하시는 것 다 드렸을 텐데요.
**어디로 모셨어요?
실향민들이 함께 잠든 파주 통일동산에 모셨어요. 고향이 평안북도 선천인데 그곳이 그나마 고향과 가장 가까운 땅이지요.
전계현 여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이제는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부군에 대한 사모의 정을 잠시 참지 못한 듯이 느껴졌다.
1971년 여덟 살 연상인 아폴로 박사의 짝사랑을 받아들여 그의 아내가 됐지만 부군은 40년이 넘는 결혼생활 동안 첫사랑의 초심을 버리지 않고 아내를 위해 순정을 베풀고 떠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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