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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미, 두 번의 결혼에서 일어난 일? 내 전 남편 은 좀도둑 처럼 사방 을 기웃 거 렸 다! 가혹한 시어머니, 시누이 4명과의 갈.등.은...

fan1989 2021. 7. 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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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탤런트 박해미 전남편과의 결혼 생활, 그리고 박해미의 이혼 사유를 짚어봅니다.

 

 사실 요즘 데이트 강간이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게 있는데, 박해미가 그런 피해자라고 할 수 있죠.

 

먼저, 박해미의 어린 시절부터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박해미 집안은 굉장히 유복했는데, 박해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끼와 예술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박해미: "아버지는 춤을 좋아해서 캬바레까지 운영했고, 어머니는 성악을 전공하려다 포기하셨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응원단장까지 지내셨을 정도로 끼가 많으셨다."

 

또한, 박해미 집안은 충청도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부잣집이었고, 6남매중에서 박해미가 장녀였죠.

박해미: "어릴 때 교회 성가대로 활동했고 크리스마스 때 캐럴을 부르려고 새벽부터 집을 나갔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말리기 위하여 종아리까지 때리셨지만, 난 어머니 몰래 담을 넘곤 했다."

 

박해미: "할머니 환갑잔치 때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풀어서 살풀이춤을 추었는데,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끼를 타고 났다고 말했다."

 

확실히 박해미에게 춤과 노래 등에 대한 끼가 어릴 적부터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런 박해미를 어릴 적부터 보아온, 박해미 여동생이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부모님이 우리 앞에 비단길을 깔아놓으셨다. 그런데 언니는 그 비단길을 안 걷고 자갈길을 걸었다. 예전부터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박해미 여동생: "하지만 언니처럼 평생을 열정적으로 사는 것도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박해미도 동생들처럼 집안 재력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도 있었을텐데, 전혀 그러지를 않았네요.

 

박해미: "중학교때부터는 집안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는데, 쉬지 않고 과외를 받을 수 있었어요. 일탈을 즐기러 고고장에 춤추러 가기는 했지만, 비행청소년의 길은 걷지 않았어요."

 

결국 박해미는 이화여대 성악과에 쉽게 합격했고, 여기서 성악을 전공하게 됩니다.

 

박해미: "대학 시절에 놀기는 많이 놀았지만, 가치관은 보수적인 편이었어요."

 

박해미: "1학년 때 미팅을 몇번 했는데, 저의 얌전한 모습에 남학생들이 오해를 할 정도였죠."

하지만 박해미의 재능은 넘쳤고, 결국 대학 3학년때부터 무대에 설 수 있었죠.

 

하지만 이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박해미의 성악가로서의 길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합니다.

 

박해미: "이성에 대한 눈이 떠지고 멋부리기를 즐기게 되었다. 그러면서 살을 빼기 시작하니, 성악도에게 치명적이었던 소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박해미: "당시까지 해왔던 모든 공부들이 잘못되었다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이었던 대학 4학년때 박해미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박해미의 전남편이었던 임모씨였죠.

 

참고로 당시 박해미 전남편의 직업은 대기업 직원이었고, 홀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남매중에서 유일한 외동아들이었기에, 홀어머니의 기대치가 굉장히 높았죠. 

 

박해미: "전남편이 처음에는 교문에서 무작정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요즘말로 치면 마치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박해미의 자서전에 이런 서술이 나옵니다.

 

우연찮은 식사자리 후 스카이라운지에 가서 차마심을 빙자해 러브호텔이란 곳에 생전 처음 따라갔다가 강간을 당하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랑을 고백하고...

 

전남편은 한없이 선한 얼굴로 용서를 구하고 더할 나위 없는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통에 그때부터 강제 애인이 되어...

 

박해미의 첫번째 결혼, 박해미 첫남편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데이트 강간을 당한 다음에 아이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박해미: "주변에서 무조건 반대했지만, 전 첫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여기에서 '첫남자'란 무슨 뜻인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아무튼 박해미는 졸업하던 해인 1987년 서울시립가무단에 수석 합격할 정도로 재능이 출중했지만, 1988년 임신과 함께 결혼하게 되면서, 무대로부터 은퇴를 하게 되었죠.

 

이때 박해미의 첫번째 아들이 바로 임성민입니다.

 

참고로 박해미 아들 임성민은 나중에 서울대를 졸업하고 카투사에서 근무를 했으며, 나중에는 그 역시 대기업 회사원이 되었죠.

 

박해미: "큰아들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을 당시에 정말 뿌듯했다. 그래서 아들을 꼭 안아줬다."

 

그런데 박해미의 결혼 생활이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시어미니와의 고부 갈등, 특히 며느리에 대한 심한 폭언과 남편의 의처증, 시누이 4명과의 갈등은 박해미를 갈수록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 박해미의 친정 집안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기에 국내에 의지할 수 있는 곳도 없게 되었죠.

 

박해미: "친정 어머니가 함께 캐나다로 떠나자고 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남보기엔 그럴 듯하게 살아보고도 싶었고, 아들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버텨보고 싶었다."

 

박해미: "당시 하룻밤 사이에 정수리 부분 머리가 흰머리로 변했다. 지금도 내 머리는 전부 백발인데, 평소에 염색을 하기에 티가 안난다."

 

당시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다 쉬어 버렸네요.

 

게다가 당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박해미: "당시 작은 음악 전문학원을 운영하면서 취미로 볼링을 배웠는데, 남편은 매일같이 속옷 검사까지 했다."

 

박해미: "내가 남자 회원들과 어울리는 것을 전남편이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박해미가 시누이와 다툼을 벌였는데, 말다툼을 벌이는 중에 남편이 박해미에게 도청 장치까지 했다는 것이 발각이 되었죠.

 

결국 박해미는 그토록 사랑했던 큰아들까지 포기한채 이혼 도장을 찍게 됩니다.

 

박해미: "헤어질 당시 시 큰아들 나이가 불과 6살이었다. 한창 엄마품을 그리워할 나이였기에, 항상 미안해 했다."

 

박해미: "그로부터 7년 뒤에 큰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난 큰아이가 날 원망하면서 모른 척 할까봐 무척이나 망설였다."

박해미: "그런데 큰아이가 내 손을 잡더니, "엄마 예쁜데? 엄마가 자랑스럽다"라고 말해주었다."

 

박해미: "당시 큰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오히려 나를 위로해줬다. "엄마 이혼한 게 뭐가 창피해?"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게다가 드라마에 나온 내 모습을 보고는 왜 아줌마처럼 나오느냐고, 나를 무척 예쁜 사람으로 봐줬다."

 

박해미 큰아이도 자기 엄마가 어쩔 수 없이 자신과 떨어져 살아야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네요.

 

이후 박해미 큰 아이는 이복 동생인 박해미의 둘째 아들 황민의 과외 선생님 노릇도 해주는 등, 박해미의 다른 가족과 마치 친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박해미: "큰아이가 둘째 아이의 과외 선생님 노릇을 해주는 등, 살갑게 대해줘서 정말 든든하고 고맙다."

 

그런데 이혼 한 다음의 박해미의 배우 생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서울시립가무단에 수석 합격을 하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박해미에게 경력은 별로 없었습니다.

 

결혼으로 무대를 일찍 떠났기 때문이었죠.

 

결국 박해미는 1993년 뮤지컬 장보고의 꿈에 참여하여, 3년동안 남미와 유럽 23개국을 도는 일정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3년 후에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에도 박해미가 설 무대는 잘 없었고, 결국 박해미는 남들이 하기 꺼려하던 '각시 품바' 역을 맡게 되었죠.

박해미: "하지만 여전히 저에 대한 소문은 안 좋아요, 하하. 드라마 끝난 뒤에 ‘변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꼴통’이라고 욕한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사실 각시 품바때문에 박해미는 재혼 남편인 황민, 박해미의 두번째 남편인 황민을 만날 수 있었으니,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박해미의 인생은 좀 험난했습니다.

 

재혼 남편 황민과 함께 뮤지컬 제작을 했다가 실패하고 빚 5억원을 지기도 하고 (밑에서 추가 설명), 뮤지컬쪽 사람들이 박해미를 잘 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박해미: "사실 뮤지컬 기획자들이나 제작자들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제가 뮤지컬 맘마미아 오디션때 뽑힐 수 있었던 것은, 선입견이 없는 영국 스태프들이 직접 참여했기 때문이었죠."

 

결국 맘마미아를 통하여 그동안 무명이었던 박해미의 이름이 비로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런 박해미를 드라마 작가였던 임성한이 하늘이시여, 에서 쓰게 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