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립스틱' 강애리자는 돌연 종적을 감췄고! 당신의 현재 삶은 어떻습니까?
1988년 서울올림픽 전야제 무대에서 '분홍립스틱'을 불러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강애리자는 돌연 종적을 감췄고,
30여년만에 활동을 재기하기 까지 우여곡절을 공개한다고 하는데요.
강애리자는 1970년대 중후반 가족 그룹이었던 '작은별 가족'으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누렸는데요.
6남1녀의 자녀와 아버지 어머니로 구성된 '작은별가족'은 가족 모두가
플루트, 바이올린, 트럼펫, 첼로, 대금 등 3~5개의 악기를 연주해 크게 화제가 됐고, 국내외적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작은별 가족'의 단장이자 아버지 강문수는 "당시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서 (우리들을) 북으로 데려가고 싶어했고, 그 때문에 일본 공연을 할 때에는 일본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기고 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강애리자는 1988년 서울올림픽 전야제에서 부른 '분홍립스틱' 무대를 마지막으로 1남1녀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부모 형제와 떨어져 지내며 맘것 모래를 부르지도 못했던 미국 생활 15년 동안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혼을 결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데, 현재 남편 박용수의 따뜻한 보살핌과 격려 덕에 우울증과 무대공포증을 극복하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생다큐 마이웨이'에서 오랜만에 ‘작은별 가족’이 함께 모인 반가운 현장도 공개된다고 하는데요.
히트곡 ‘분홍립스틱’, 30여 년 만의 신곡 ’울엄마’도 모두 강애리자 오빠 강인구가 여동생을 위해 만든 곡.
강애리자는 가수 전영록과 40년 우정을 자랑하는 사이라고 하는데요. 두 사람에겐 닮은꼴 사연이 있다고 하는데,
정부정책으로 인해 두사람 다 전성기 시절 반강제적으로 활동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80년대 최고의 청춘 스타였던 전영록은 “내가 옷깃을 세우고, 운동화를 신는 것이 청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갑자기 군대를 가게 됐다”고 말하고, 강애리자는 당시 정부의 산아제한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7남매가 함께하는 ‘작은별 가족’은 활동에 제약을 받았었다고 하네요. 당시는 군부독재정권 시절이라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말도 안되는 사연인거 같네요.
강애리자 나이 14살이었던 1975년 아홉 명으로 구성된 음악가족그룹 '작은별가족' 1집앨범 '나의작은꿈'으로 데뷔했습니다. 14살이면 중학생 시절에 데뷔를 했다는 거네요...
방송극작가 겸 영화감독 출신의 아버지(강문수)와 서울음대 성악과 출신의 어머니(주영숙)를 필두로 6남1녀로 구성된 이들은 TV 만화영화 주제가 모음집을 발표하며 일반무대에 진출했고, 이듬해 데뷔 앨범을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데뷔했습니다.
강아래자는 7남매 중 여섯째 외동딸. 위로 오빠들 다섯 명과 아래로 막내인 남동생 강인봉이 있습니다.
7남매 모두 무대에서 두 개 이상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강애리자는 피아노 오르간 플루트의 연주에 능했습니다.
'작은별가족'은 6남 1녀와 부모 등 총 9명으로 구성된 그룹이었으며 1976년 서라벌레코드에서 출시한 TV 만화영화 노래모음집 '어린이 왕국'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나의 작은 꿈' '너 나의 미소' 등으로 히트를 치며 1970~80년대를 주름 잡았습니다.
그러나 1985년 이후에는 그룹이 아닌 각자의 활동에 집중했고, 강애리자와 막내 강인봉 정도만 연예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고, 나머지 가족들은 대부분 연예계를 떠났습니다.
강애리자 - "첫째 오빠는 컴퓨터 회사를 하느라 외국을 오가고 있다. 둘째 오빠는 전도사고, 셋째 오빠는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넷째 오빠는 요식업계에 종사하고 있어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만 현역에 있다. 사실은 다섯째, 일곱째만 있다가 최근에 내가 낀 것"이라며 작은별가족의 근황을 알린 바 있습니다.
물론 6남1녀 모두가 여전히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는 있었습니다.
강애리자 - "셋째 오빠 같은 경우는 일을 하며 주말에는 색소폰과 플루트를 가르친다. 다른 오빠들 역시 악보를 주고 연습을 시키면 할 수 있는 정도"
'작은별가족' 7남매 아버지 강문수와 어머니 주영숙 역시 여전히 음악인이었습니다.
강애리자 -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세 번째 트랙에 담긴 '너는 내 마음'에 부모가 직접 참여했다. 96세인 아버지가 작사를, 86세인 어머니가 피처링을 맡아 나와 듀엣을 했다. 아들, 딸 사위, 며느리 할 것 없이 젊은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로 꼭 추천해주고 싶은 곡"
1986년 남편 박용수와 결혼한 강애리자는 1998년 솔로앨범을 냈고, ‘분홍 립스틱’이 히트한 이후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기 위해 가수 활동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강애리자 - "88 서울 올림픽 전야제에서 분홍립스틱 노래 부르고 나서 잠깐 쉰다는 게 이렇게 오래 지났더라"
강애리자는 1996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며 가수 활동을 완전히 중단했는데요. 뉴저지를 거쳐 캘리포니아에서 살던 그녀는 2011년 귀국했습니다.
강애리자 - “3년 전 아들을 장가보내고 갱년기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2015년 9월에는 그 우울증에서 벗어나자며 남편하고 2주간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보기도 했지만 가슴이 허하고 우울해서 견딜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코러스를 제안받아, 노래를 부르는 데 그때부터 너무 행복했어요"
우울증 치료를 위한 마지막 시도가 바로 노래였다고 하는데요. 2015년 11월쯤 다시 노래하기 위해 준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강애리자 -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노래도 안 되고 발음까지 안 되는 거예요. 아이 키우고 살림한다고 25년 이상 노래를 하지 않다가 다시 취입한다고 덤벼들었으니 바로 될 턱이 없었지요.”
강애리자 - "아무리 연습을 해도 좀처럼 나아지질 않아 울면서 안한다고 연습실을 뛰쳐나간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오빠가 “서둘지 말고 천천히 하자”고 다독이며 용기를 줘 8개월 만인 2016년 8월 신곡 3개의 취입이 끝났다."
강애리자의 복귀를 위해 ‘작은 별 가족’에게 마치 총동원령이 내려진 듯 합니다.
아버지(강문수)가 작사가로 참여하는가 하면 어머니가 듀엣으로, 또 세 번째 오빠 강인엽과 가족의 막내 강인봉이 세션에 참여해 연주를 해주고 심지어는 매니저 역할을 하는 그녀의 남편 박용수씨까지 코러스를 맡았기 때문.
어렵사리 녹음이 끝나고 CD가 나왔지만 그녀는 굉장히 겁을 많이 먹었다고 합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인데 TV에 나가 노래하다가 실수하면 바로 망하는 게 아닌가 고민이 되었다고...
율동도 되지 않고, 아무리 연습을 해도 노래가 예전만 못하니 괜히 나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MBC의 ‘복면가왕’에 나가보자는 얘기까지 나왔으나 노래는 고사하고 나중에 복면을 벗었는데 사람들이 몰라보면 안 나간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며 금세 포기했다고..
그래도 힘을 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벤트와 작은 공연무대 등 자신을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쫓아가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젊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40대 이상의 팬들이나 겨우 그녀의 히트곡 ‘분홍 립스틱’을 알 정도였다. 2~30대의 팬들은 ‘분홍 립스틱’을 영화 ‘광복절 특사’의 삽입곡으로 리메이크한 여배우 송윤아의 노래로 아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란마’, ‘플란더스의 개’, ‘마스크맨’ 등 TV로 방영된 만화영화 주제가들을 부르자 20대의 팬들도 박수를 치면서 따라 부르고 좋아했다고... 팬들이 좋아하며 반기니 노래와 율동이 예전만 못해도 힘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애리자 - “열 명이나 스무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고 해도 가서 노래하겠다며 나서곤 했어요. 재워주고 기름 값만 준다고 해도 쫓아가서 노래하곤 했는데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어요.”
강애리자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내 목소리가 나오는 한, 70, 80살이 돼도 누구든 불러주면 ‘마징가 제트’ ‘짱가’처럼 나타나 노래를 하는 게 내 목표에요. 노래를 부르는 게 너무 즐겁고 좋아요. 노래를 처음 시작하던 그 때처럼 노래할꺼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