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지일은 자취를 감추었을까요? 왜 이런 데서 일을 해요? 인정받는 것이 당황 스럽습니다! 굴곡진 인생!
과거 한시대를 주름잡았던 한지일의 최근 근황이 알려져서 화제입니다.
사실 한지일 하면 과거 젖.소부인 바람났네의 제작자로 엄청난 돈을 쌓았던 인물입니다.
무려 금액이 100억원대라고 하는데요.
당시 100억원이면 한지일은 어마어마한 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지일은 제작자이기도 했으나 70~80세대에서는 알아주는 배우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졌는데요.
왜 한지일은 자취를 감추었을까요?
한지일의 인생사는 파란만장했다고 말할 수있을거 같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고 평탄치 못했는데요.
신필름을 차리고 '성인 영화계의 대부'라 불렸던 한지일은
"300편을 제작했는데 180편이 히트쳤다. 한 작품당 약 5만 장을 만든다. 그때 비디오 1개당 2만 2천 원이라 한 작품 당 7억~8억 원정도 벌었다"고 밝혀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한지일은 지나친 욕심을 부려 사업 확장을 하고 빌딩을 짓다가 때마침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때 파산하고 부인과도 이혼하게 되는 불운이 따릅니다. 한순간에 모든 재산과 단란한 가정을 송두리체 잃고 이후 방황하는 뜬구름 같은 인생을 살아오게 됩니다.
한지일은 IMF 이후 운영 중인 영화사 경영권을 아내에게 넘겼는데 그는 "아내와 별거하다가 아내가 일하는 영화사에 찾아갔다. 찾아가니 스태프들이 대본을 들고 일하고 있더라. 그걸 목격하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나와' 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말했다.
이어 "억울한 마음에 근처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사서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며 "이성을 잃은 거다. 감독도 갔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던 시절이 있다. 우울증이 왔고 나쁜 생각도 했다"고 고백했다.
1999년 저지른 당시 방화로 한지일은 서울고등법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상가 3층의 아들 명의 전셋집에 혼자 살고 있는 한씨는 "IMF 이후 아내와 이혼해 아이들은 아내와 함께 산다" 면서 "지난 40년간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것이 10년도 채 안 된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2005년 모든 걸 버리고 돌연 미국으로 떠나버리는데. 10년 이상 미국에서 지내며 택배와 주유소 아르바이트·자동차 세일즈맨 등 27개가 넘는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는 한지일.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도주하듯이 미국 LA로 건너간 한지일은 힘든생활을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그래도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해서 미국 생활에 점점 적응을 해가며 2010년 LA에 위치한 마트에서 제너럴 매니저 직급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좀 생활이 나아지나 했더니 한국에서는 미국에서 일하고있는 한지일의 소식을 방송하며 미국에 거주하는 많은 한인들이 그를 알아보게되었고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결국 시카고 쪽으로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한지일 - "미국 대형 한인 마트에서 손님 물건을 박스에 담는 일을 했다. 한달에 200만 원 정도 받았다. 최하위 월급이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나를 알아보더라. '왜 이런 데서 일을 해요?'라고 묻길래 울었다"라고 밝히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는 것 역시 만만치가 않아서 생활을 위해 27여가지의 일을 닥치는대로 했다고 합니다. 이후 미국에서 지칠대로 지친 그는 12년의 미국생활을 접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 시작하기 위하여 베트남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2017년 10월 한지일은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을 받고 신성일 회고전을 위해 오랫만에 귀국을 하였습니다. 그 후 다시 베트남으로 가려는 한지일을 동료들이 만류하였고 이후 한국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한국에 다시 정착을 하겠다고 다짐을 한 뒤 그는 하루에 10-11시간을 일을 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데요. 주유소 아르바이트는 물론 마트에서도 일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지일은 현재 서울의 한 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희가 넘은 노인이 웨이터 일을 하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며 “흰머리 노인이 서빙을 해서 싫지 않냐고 (손님에게) 물어봤는데 오히려 재밌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단정한 옷차림과 깔끔한 외모,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웨이터라기보다는 마치 호텔 지배인 같은 그의 모습은 함께 일하는 레스토랑 직원들에게도 인정받을 만큼 성실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인생다큐-마이웨이 에서 한지일은 50년 지기 친구인 가수 장미화와 만난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인연을 쌓아온 두 사람은 오랜 친구이자 함께 봉사해온 봉사 메이트. 봉사하는 삶에서 보람을 느낀 그는 미국에서도 꾸준히 봉사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한지일은 미안하다고 말을 하지만 공황장애까지 걸리기도 합니다.
2017년 9월 중순 11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한지일. 그동안 미국에서 여러 일을 하며 힘겹게 살았는데, 주위에서 "이젠 한국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말에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후 한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계획 하던 중 장미화와 함께 봉사활동을 해 '선행 배우'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셋방에는 300편이 넘는 작품들이 여전히 남아 살아 숨쉬고 있는데요.
한지일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합니다.
한지일은 어느새 70이 넘은 노인입니다.
이번엔 새로운 시니어 모델에 도전을 하며 끝 없이 도전하는 모습이 멋진데요.
한지일의 목표와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