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심장병 돕기 성금 횡령~ 자.살 까지도 생각! 그런데 문제가 생겼죠? 억울했죠...
뽀빠이 이상용 은 "심장병 돕기 성금 횡령 루머로 인해서 자살 까지도 생각 했다고 한다. 그후에 억울한 누명은 벗었지만, 아직도 억울해한다 고 한다.
나이가 벌써 70대중반으로 인생의 황혼기를 맞았지만 ,지금 부터가 인생 2막이라 불리며 미국에서 관광가이드로 생계를 이어 가고 있다.
뽀빠이 이상용 을 생각하면 "우정의 무대"를 통해서 국군장병들의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에 입담과 진행으로 8년이란 긴 진행을 했었다.
대한 민국 행사 진행에 입담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이번에 "휴먼 다큐 사람이 좋다" 에 출연 한다고 해서 더욱 관심이 간다. 예전 차에서 테이프만 들을 수 있던 시절에 19금. 재미 있는 성인 코미디 이야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기억이 날 정도다. 너무 재미가 있어서 한간에는 고속도로에서 완판이 될 정도로 잘 팔렸다고 한다. 지루한 차운전에 비타민 같은 영양제 역활과 웃음을 선사했던 분이다.
하지만, 돌연 듯 횡령루머에 억울한 사정을 토로 하며 나중에는 거짓이라는 진실이 밝혀 졌고, 그로 인해서 모든 것을 내려 놓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용 연세가 75세인데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 가는모습을 보면 존경을 표할수 밖에 없는것 같다.
파릇 파릇한 봄에 태어 났다. 이렇게 태어난 화려한 불꽃은 밝은 태양과 동급이 될수는 없다. 성격은 화려함을 가지고 있는 불꽃 처럼 열정이 넘치고 정렬이 넘치고 매우 적극적인 모습과 행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인생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자기 관리를 소홀이 하지 않는 이 분이야 말로 대한민국 최고에 진행자라 할수 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고 자주 방송을 통해서 얼굴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1970~1990년대 ‘어린이 대통령’이라고 불리며 인기를 끌었던 ‘뽀빠이 이상용’씨가 《월간조선》7월호에 근황을 털어놓았다. 이상용(78)씨는 이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 방송 데뷔, 한국어린이보호회 활동, 어린이보호회 후원금 횡령 의혹으로 인해 받았던 고통과 재기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1980년 ‘모이자 노래하자’ 녹화장으로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찾아오셨어요. 얘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아버지는 천식으로 일을 할 수 없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홀로 6남매를 키우고 있다는 겁니다. ‘수술 안 하면 죽는다, 아이 좀 살려달라’기에 두말 않고 바로 ‘그렇게 하자. 알겠다’라고 했죠.”
문제는 수술비였다. 당시 살던 집 보증금이 600만 원이었는데 수술비는 1800만 원. 회당 출연료 16만 원으로는 감당 불가능한 액수였다.
“덜컥 약속을 하고 바로 도상국 어린이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이미지 관리하느라 야간 업소 출연을 고사하고 있었는데, 오비스 캐빈, 라데빵스, 로즈 가든 세 군데 출연료 3달 치를 가불(假拂)했어요. 바자회도 하고 지인 돈도 빌리고, 발로 뛰면서 겨우 수술비 만들었죠.”
본인에게도 1남 1녀 어린 자녀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병약한 몸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이상용에게 심장병 어린이의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수술은 성공.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감격한 도 군의 아버지가 주변에 사연을 전했고,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들이 뽀빠이의 사당동 집으로 몰려왔다.
“처음에 아내가 그러더군요.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할 거냐. 우리는 수술비 반도 안 되는 액수의 전셋집에 사는데…’. 나중엔 ‘아이가 죽게 생겼는데 그 부모 마음은 어떻겠냐’며 이해해 줬습니다.”
아내의 인정과 격려에 용기를 얻어, 합정동에 ‘한국어린이보호회’ 사무실을 내고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죠?
“1996년 11월 여의도 목욕탕에서 잡혀갔어요. ‘우정의 무대’ 화천 군부대 녹화가 있던 날 아침이었죠.”
이른바 횡령 의혹이었다. ’4500만원짜리 집이 아니라 40억 호화주택에 산다', ’30년 고물차가 아니라 벤츠승용차를 탄다', ‘후원금 빼돌려 파주에 땅 만 평을 샀다’고 했다.
기자가 묻길래 “그런 집, 차, 땅 있으면 찾아서 당신이 가지시오”라고 했다. 수사를 받았지만 1997년 2월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시작부터 함께했던 분신 같은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1989~1997년)는 아예 폐지되었다. 누가 왜 그랬는지 짐작은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 대전역 앞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프린트물을 돌리던 아버지가 아들의 일에 대한 충격으로 7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것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억울했죠. 한때 왼쪽 눈이 안 보였고, 수면주사 두 대를 맞아도 잠을 못 잤어요. 더 가슴 아픈 건, 수술을 기다리던 심장병 어린이들 중에서 사망자가 나왔다는 겁니다.”
미국 서부로 건너가 고려대 출신이 대표로 있는 여행사에서 관광가이드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하루에 관광버스를 13시간 탔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무혐의 판결이 났고 한국 관광객들이 ‘억울하겠다, 우린 다 안다’며 팁을 많이 주셨어요. 팁 받는 사람이 그 돈으로 도박할 순 없잖아요? 라스베이거스를 수없이 갔어도 슬롯머신 한 번 안 했습니다. 2년간 팁 9000만 원을 모아 딸을 시집보냈죠.”
그의 버스 탑승 후 후배 회사를 찾는 관광객이 두 배쯤 늘었지만, “국민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아내의 한 마디에 귀국을 결심했다. 돌아오기는 했지만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서 전남 구례 비닐하우스에서 상추, 마늘 농사를 짓고 경남 일대에서 꽃모종을 심으며 6개월을 보냈다. 일당 3만 원. 그 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가족에게 가장의 의무를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 후 집에 오자마자 엉엉 울었던 기억도 지워주고 싶었다. 개그우먼 문영미와 녹음한 ‘이상용의 폭소열차’(1999년)는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음반이다.
“CD를 들고 제가 직접 행담도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3년 동안 팔았습니다. 손님들 오시면 몇 분 앞에 두고 즉석 개그도 했죠. 지나가던 분들이 신기해하며 ‘요즘은 잘 지내냐’며 걱정도 해주시고 덕담도 해주셨습니다. 응원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물건도 많이 사주셨어요.”
현숙, 유지나, 태진아, 조항조, 송대관 등 가수들이 행사장에 가는 길에 일부러 들러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같이 CD도 팔고, ‘화장실 앞’에서 노래도 불러줬다. KBS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2년(1985~1986년) 할 때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이다.
CD는 10탄까지 제작할 만큼 대박이 났지만, 생각보다 가계에 보탬을 주지는 못했다. 저작권 개념이 모호하던 시절이어서, 정본보다 복사본 판매량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CD를 만든 건 잘한 일이다. 이상용을 처음 발탁했던 유수열 PD(당시 춘천 MBC 사장)가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