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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현재남편 재혼..씨가 네번째 부인이라!! 돈때문에 이혼~복잡한 인생, 어린시절 어려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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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an1989 2022. 8. 2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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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선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최고의 보컬리스트다.

 

가수 이선희의 인생은 정말 파란만장합니다.

남들과 다른 어린 시절과 가수 데뷔, 그리고 여자의 몸으로 거의 톱자리에 앉을 정도로 큰성공을 거둡니다.

 그러다가 첫번째 남편과의 결혼과 이혼, 뒤이은 전남편의 죽음은 이선희에게 큰 충격을 주었죠. 그런뒤 두번째 남편을 만나서 재혼을 했는데, 그 남편의 정체가 좀 베일에 쌓여 있습니다.

 

가수 이선희는 가창력 뿐만 아니라 작사와 작곡에도 능한 싱어송라이터인데...

영화 '왕의 남자'에 쓰였던 명곡 '인연'을 포함한 13집의 노래

전곡을 전부 이선희가 작사 작곡했다고 한다.

 

우선 이선희 할아버지는 신학문을 경계하고 가야금과 창을 즐기면서 선비로서의 풍류를 좋아했습니다. 따라서 아들이 신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막았죠. 결국 이선희 아버지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절로 들어갔고, 불교 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대처승이 됩니다.

따라서 이선희 집은 절이거나 절 근처의 민가였고, 이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이선희: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는데 집에 스님들밖에 없는 모습을 본 친구들이 '선희 아버지는 스님'이라며 놀렸다.

다음날부터 특이한 가정환경 때문에 왕따를 당했다. 그 후로 꽤 오랜시간 동안 친구가 없었고 그것 때문에 더 내성적인 아이가 됐다."

 

 이 때문에 이선희는 혼자 숲속을 거닐기를 좋아했고,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선희: "할아버지와 내가 산보를 나갈 때마다 할머니는 쌈지 가득 마늘과 쪽파를 채워서 할아버지께 건네 드리곤 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마늘과 쪽파를 좋아하셨다."

 이선희: "여기저기 걸어 다니다가 다리 쉬엄이라도 할라치면 할아버지와 나는 마늘과 쪽파를 먹었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지만 그때 그렇게 많이 먹은 생마늘이 내 고성(高聲)의 원천이 아닐는지..."

이선희 본인은 생마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마 이선희 가창력의 근원은 할아버지때부터 내려오던 음악성이 3대째에 폭발한 것이 아닌가 하네요.

 

그렇게 왕따를 당하던 이선희였지만, 자신의 빼어난 실력으로 왕따를 차츰 극복해 나갑니다.

이선희; "등학교 때 학교에서 뮤지컬을 한 적이 있었는데, 너무 내성적이었던 나는 배역이 작은 참새 역을 맡았다. 그런데 내가 한 번에 노래를 외워부르자 선생님이 점점 내 파트를 늘려주셨고, 결국 주인공을 맡게 됐다. 그러자 친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됐다."

 

 이선희; "이후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노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량스러운 학생들도 가끔 나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고, 내가 노래를 부르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해 난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며 조언을 해줬다."

 

 집안의 특별한 환경으로 왕따를 당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친구관계를 회복했고, 또 소통까지 했네요.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던 이선희는 1984년 강변가요제에서 일약 혜성처럼 나타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선희의 연예인 활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마침내 조건부로 허락해줍니다.

 이선희 아버지; "추문을 일으켜 매스컴 오르내리는 가수는 되지 말것. 바깥에선 네가 스타일지 몰라도 집에 오면 내 자식이고 내겐 아직 어린애일 뿐임을 명심할 것.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다시는 노래 못 부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1986년, 이선희는 첫번째 남편이었던 윤희중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윤희중이 이선희의 매니저로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원래 음반제작자이면서 본인이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였죠.

 

그리고 그 무렵인 1992년 이선희는 윤희중과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선희: "오랫동안 함께 일해오면서 인간적인 신뢰감이 쌓였고, 교통사고를 당해 몇 개월간 병원을 다니면서도 새 앨범 준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큰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윤희중: "철저한 외조로 우리나라에도 자랑할 만한 가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둘은 1993년 딸 양원이를 낳으면서 행복하게 사는가 했습니다. 하지만 윤희중은 연달아 사업에 실패하면서 1998년 IMF금융위기때 집까지 경매에 붙여지게 됩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이선희와 윤희중은 합의 이혼하게 되고, 딸의 양육권은 이선희가 가지게 됩니다

 

윤희중은 재기의 노력을 하지만, 계속된 사업 실패와 빚 독촉으로 1999년 6월 음독 자살하게 됩니다.

 

 당시 콘서트 준비중이었던 이선희는 이 소식에 실신하고, 병원으로 실려가게 됩니다.

이혼은 했지만 전남편을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국 콘서트에 서게 된 이선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순간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래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노래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무대에서 쓰러지는 날까지 노래하고 싶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저역시 그래요. 지금 이 순간 하늘에 계신 분도 저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 노래를 바칩니다."

그리고 이선희는 마지막으로 '나의 거리'를 부릅니다. 바로 전남편 윤희중이 작사 작곡했던 노래였죠.

'…그대 떠난 이 거리에 바람만이 불어오네… 어둠만이 짙어가네'

 

그 이후 이선희는 딸 육아와 이승기 등의 제자를 키우는데 집중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2006년 재혼 소식을 알립니다.

 

이선희: "일반인인 배우자가 사생활 노출을 꺼리기 때문에 비밀리에 결혼했으며, (당분간은 한국을 떠나) 미국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음악 공부를 할 계획이다. 전부터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는데 남편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선희 두번째 남편인 정모씨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고, 다만 나이는 이선희보다 9살 연상으로 알려집니다.

또한 당시 언론을 통해서 이선희 남편은 LA에 기반을 두고 한국을 오가는 재미 사업가이고, LA와 서울에 집이 있다는 것이 알려집니다.

(둘은 미국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남편의 서울에 있는 집이 공교롭게도 이선희와 같은 동부이촌동이고, 둘의 집이 매우 가까운 편이었음)

 

 그런데 정모씨의 전처(전부인)이 국내 모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논란이 일어납니다.

정모씨의 전처: "2년 전 여자가 생긴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 받았고 그후 1년여 소강상태를 보여 오다 지난 5월말부터 전남편 정씨의 이혼 요구가 거세졌다."

 

정모씨의 전처: "결혼 당시엔 재혼인줄 알았는데 하고 보니 삼혼이더라."

 

이 말에 따르면 정모씨가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딴 여자가 있었다는 것이 되고, 또 이선희는 정모씨의 네번째 부인이 되는 것이죠.

어쨌든 이선희가 정모씨와 5월에 만났느냐, 6월에 만났느냐는 한동안 논란이 됩니다. 5월이었다면, 사실상 이선희가 그 이혼사유가 되는 셈이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정모씨의 원래 신분이 좀 더 정확하게 밝혀집니다.

원래 서울 유명 사립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했고, 미국 유학으로 석사 학위를 딴 건축사입니다.

또한 현재 건축디자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면서, 모 사립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합니다.

정모씨 소유의 빌딩인데, 높이 6층짜리 건물입니다.

양재천이 내려다보이는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어 커피숍, 주점, 병원들이 들어선 상권이죠.

 

임대 수입이나 건축가와 교수 활동, 이런 재산 등으로 보아, 재력이 상당한 것 같네요.

아무튼 정모씨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거부합니다.

정모씨: "재혼할 당시 확인되지 않은 악의적인 보도가 너무 많이 나가는 바람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아마 국내 언론과 인터뷰를 했던 전처 얘기인 것 같습니다. 당시 한국 언론들은 그의 전처 이야기만 듣고는 확인 작업 없이 그대로 기사화했죠. 아마 정모씨에게 확인 작업을 거쳤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렇더라도 정모씨는 자신의 전처가 2년전부터 여자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힐 필요가 있네요. 자신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가수 이선희의 이력 중 특이한 점은 청소년 돕기 공연을 해서 그 수익금을

학생 가장들에게 기부하는가 하면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을 위해 꾸준히

나눔을 하는가 하면 위안부 할머니 보금자리 마련을 위한 공연도 진행했었다.

그 당시에는 소년, 소녀 가장이라는 단어가 생소했을 때라,

지금 연예인들의 기부문화의 시초라 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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